네이버 일본어사전에 요바이(夜這い)는 밤에 남자가 애인의 침소에 숨어 들어 정을 맺던 일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요즘은 일본 성인AV 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말이다.
일본의 에로 이야기 요바이
다이쇼(大正 1912-1926)시대까지 일본 각지에서 행해졌던 풍속. 실제로는 전후 고도성장기 직전까지 농어촌지역에서는 행해졌다고 한다.
일본 전대미문의 연속 살인사건 츠야마(津山)사건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1938년 5월21일 새벽 오카야마현의 한 농촌마을에서 발생한 대량 살인사건으로 일본도와 엽총으로 2시간 만에 30명을 죽이고 범인은 자살한 사건이다.
이 살인자의 아내도 요바이를 당했다고 하는데 이 점도 살인 결행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다.
시초는 고대 일본은 여성중심의 사회로 결혼을 해도 같이 사는 것이 아니고 따로 살면서 여자집을 드나들었던 것에 기원한다. 결혼을 하면 공식적으로 드나들수 있었다는 것이 다른 점이지만....
요바이 마을 - 달아오르는 유부녀
위키피디아
http://ja.wikipedia.org/wiki/%E5%A4%9C%E9%80%99%E3%81%84
이하 인용.........
요바이(夜這い : よばい)가 근절된 것은 채 백 년도 되지 않는다.
1200년경 왕조시대 부터 시작된 요바이(夜這い)는 남자가 이집 저집을 돌아 다니며 여자와 함께 밤을 지낸 뒤, 그중 마음에 드는 여자와 결혼을 하는 풍습 이었다. 그 후로 마을축제 때 하나의 행사로도 즐기게 되었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여성은 인기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오히려 여성 쪽에서 남자를 기다리는 풍습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후로는 기혼여성도 이런 풍습을 즐기게 되었다. 성의 개방은 곧 성문란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메이지(明治)시대(1868~1912)에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요바이(夜這い) 금지령'을 내렸다. 그후로 유교사상을 널리 보급 했지만 1900년 초반까지도 농촌에서 축제(祭り : まつり) 때 공공연히 시행되었다.
16세기 明이 그린, 明나라 해안(揚子江 이남 해안)에 출몰하며 노략질하던 倭寇의 모습을 그린 倭寇圖券 속의 倭寇도 下衣를 입지 않고 있다. 다만 왜구도권 속의 倭寇는 엉덩이가 덮이는 上衣를 입고 있다. 하지만 通信使 行列圖나 우타카와 히로시게(歌川廣重)의 판화로 보건데, 倭奴의 상의는 엉덩이가 다 덮이지 않는 짧은 것이었다. 보는 사람이 민망해서 엉덩이 부분을 덮어준 걸로 짐작된다.
1711년 通信使 行列圖는 사실대로, 있는 그대로 그린 그림 이었던 것이다. 倭奴들은 엉덩이도 다 덮이지 않은 상의 하나만 걸치고 거리를 활보했던 것이다.
中國倭의 이주 후 기모노(きもの)성행위, 혼욕(混浴), 요바이(夜這い)라는 문란한 性文化의 이식과 병행하여 日本 男子들은 下衣를 입지 않게 되었다. 그래야 여자를 보는 즉시 寸刻을 다투어 기모노(着物)성행위, 混浴, 요바이(夜這い)를 실행에 옮길 것이 아닌가. 그러니 남의 나라를 약탈 하면서도 특별히 예의를 갖춰 하의를 갖춰 입지는 않았다. 上衣를 입지 않는 종족은 많았고 지금도 있으나, 下衣를 입지 않는 민족은 日本이 唯一하다.
기모노(きもの) 역시 中國倭가 이주하면서 전수한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은” 華夏의 옷에서 비롯 되었다. 오로지 성행위를 즐기기 위해 고안해낸 옷으로 きもの 자체가 성행위를 위한 일습(一襲) 이라고 한다. 즉 성행위용품을 몸에 걸치고 다니면서 지나가는 남자의 요구가 있으면 언제든지 응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복은 치마와 저고리 두 개로 나뉘어 있지만 기모노는 넓은 천을 둘둘 감는 식이다. 뭐니 뭐니 해도 포인트는 오비(帶 : おび)다. 복대 같은 넓은 띠인데 저고리의 옷고름과는 달리 배에서 가슴 아래까지를 통째로 감싼다. 이 오비(おび)만 풀리면 기모노(きもの)는 완전 '무장해제'가 된다.
여체를 잘 드러내도록 꽉 동여맨 듯한 기모노(着物)의 또 한 가지 비밀은 '속'에 있다. 일본인들은 오래 전부터 기모노(着物)를 입을 때 항상 노팬티였다고 한다. 여기에 대한 설이 분분하다.
여체의 선에 포인트를 맞춘 이들은 팬티 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아예 생략 했다는 말도 있고, 종족번식을 위한 어쩔 수 없는 '고육책'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바쿠후(幕府) 시대 들어 파벌간의 싸움이 심해 지면서 남자들의 씨가 점점 말라가자, 여성들은 언제 어디서든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다녔다는 얘기도 그럴 듯하다.
혼욕(混浴)은 에도(江戶)시대(1603∼186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마쿠라에(枕繪)'라는 당시의 음화에는 남녀들이 뒤엉켜 온천 성행위를 하는 장면이 노골적으로 묘사돼 있다. 환락이 극을 이뤘다는 에도 시대의 성문란은 상식을 초월했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얘기다. (기모노는 움직이는 침대…혼욕은 에도시대 환락의 상징)
기모노 노팬티-번식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 기모노가 만들어진 천년 전,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에는 평화로운 시기였다. 전쟁이 없었는데, 무슨 사람이 죽어 나가고 보충하기 위한 번식에 열중한단 말인가.
“종족번식을 위한 어쩔 수 없는 고육책 이었다”? “幕府時代 들어 파벌간의 싸움이 심해 지면서 남자들의 씨가 점점 말라가자, 여성들은 언제 어디서든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다녔다”면 그렇게 태어난, 父가 누군지도 모르는 私生兒가 사무라이가 되고 貴族이 됐다고 스스로 실토하는 소리다. 저 소리는 일부만 사실이다. 日本에는 지난 千年間 父를 확정할 수 없는 私生兒가 넘쳐나긴 했지만, 즐기다 보니 생겨난 결과이지, 번식을 위해 필사적으로 私生兒를 생산해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니면 파벌간의 싸움을 ‘지체 높은’(? 라이프 2차대전에서 사무라이를 두고 표현한 말이다.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을 테니까, 잘 기억해두도록) 사무라이들은 뒷짐지고 종놈 들에게 시켰다는 것인가. 이것은 사무라이 계급의 존재 의의를 무시하는 결론이다. 아니면 종놈이 곧 사무라이 였다는 것인가. 이 말은 사실이다. 배우자가 낳은 자식은 어쩔 수 없이 제 자식으로 받아 들여야 했던 것이다.
지난 천년 동안, 日本은 언제나 인구과잉 이었다. 그 결과 언제나 기아에 허덕였다. 高麗와 朝鮮을 침입한 倭寇는 쌀을 우선적으로 노략질했고, 朝鮮과 朝貢貿易할 당시에도 쌀 확보에 혈안 이었다. 2차 대전도 日本이 넘쳐나는 人口를 주체 못해서 일으켰다고 보는 것이 西歐의 시각이다. 대량실업과 飢餓에 대한 해결책으로 植民地를 탈취하려 했다고. 실은 日本의 주장을 그대로 읊조린 것이다.
팬티線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팬티를 입지 않았다면, 현대 일본 여자들도 팬티 없이 기모노를 입어야 한다. 기모노(着物)는 中奴의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는 옷에서 발전한 복식이다. 노팬티는 수천 년 된 中奴의 풍습 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中土로 들어가서 옷감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으니까, 이전에는 짐승의 가죽을 걸치고 있었다. (列島에는 짐승조차 귀했지만, 中土에는 그래도 짐승은 있었을 것이다. 짐승 가죽이라도 안 걸치면 그 추운 곳에서 버텨낼 수 없으니까) 이 당시부터 亂雜한 性文化를 즐기다 보니까 後代에 들어 와서도 속옷을 입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으면서 무슨 옷맵시를 찾고, 팬티線 운운할 수 있단 말인가.
朝鮮通信使가 아니었으면, 아직도 日本民族은 벌거벗고 舊石器人이나 다름없이 세계를 활보했을 인간들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인 숙종 45년(1719), 신유한(申維翰)은 통신사의 제술관(製述官·기록을 담당하는 관리)으로 일본을 다녀와 ‘해유록(海遊錄)’을 남겼다.
제술관 신유한이 오사카(大坂)에서 눈여겨 본 것 중의 하나가 그들의 성문화 였다. 그는 통역등 주위 일본인 으로부터 듣고, 직접 본 것을 토대로 40편의 글을 지어 일본인들을 꼬집고 귀국후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한다.
나의 집 칠보등은, 밤마다 날이 새기까지,
새 낭군은 앞문으로 오고,
옛 서방은 뒷문으로 가네.
(왜 풍속은 반드시 등불을 밝히고 남녀가 잠자리를 한다)
http://enjoyjapan.naver.com/tbbs/read.php?board_id=pvillage&nid=37633
[출처] 요바이(夜這い : よばい)|작성자 하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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